오늘의 음주를 위한 메인테마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가장 대표적인 술은 위스키라는데에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 면세점에서 평소에 선뜻 사기 힘든 위스키를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 이기도 하지요. 발렌타인, 글렌피딕, 조니워커 등 대표적인 스카치 위스키는 그 숙성년수만 해도 12년, 18년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입니다. 저는 오늘 위스키와 함께 시간이 만드는 맛과 생각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술 – 상상시음
저를 포함해서 보통인에게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대만위스키를 마셔보려고 합니다. 저는 면세점 찬스로 저렴하게 구입했는데요 한잔 마셔보기 전에 조금 더 재미있게 상상시음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카발란은 증류소 이름입니다. 아마도 여느 증류소들처럼 사업을 시작한 지명에서 따왔을 것입니다. 비노(vinho)는 와인이고 barrique는 배럴(barrel)입니다. 와인을 숙성한 오크통에서 숙성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겠죠. 마시기 전부터 풍부한 향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됩니다.

라벨 하단에는 제가 좋아하는 숫자들과 정보가 가득합니다. 먼저 cask no부터 보면 2016년 4월에 캐스크에 들어갔고 병입이 23년 3월(뒷편에 있었습니다)이니 대략 7년 정도 숙성됐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대만의 고온다습한 기후를 생각해보면 7년도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라벨의 왼쪽에 있는 solist single cask strength는 하나의 캐스크과 물을 타지 않은 것을 강조하고 있는 문구입니다. 계속해서 향 적인 부분과 높은 도수가 만들어내는 개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숙성 방식 덕분에 병마다 향과 도수가 조금씩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잘 기억했다가 “한병 더”를 위한 좋은 핑계거리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안주 – 사태수육과 스지
주제가 시간인만큼 안주도 시간과 관련있는 것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주요 재료는 한우 아롱사태와 스지와 시간입니다. 고기는 찬물에 긴 시간을 담궈 핏물을 깔끔하게 제거했고, 짧은 시간 초벌에 이어 양파/대파/마늘/통후추와 함께 3시간 푹 삶았습니다. 결과물은 아래와 같습니다.


긴 시간을 삶은 만큼 수육은 아주 부드럽고 스지는 쫀득하게 입에서 녹습니다. 상투적인 수사지만 그것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시간 외에 다른 노력과 재료가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집에서 꼭 한번 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시음 후기
안주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음해 보겠습니다. 향이 잘 퍼지는 잔에 따라보면 굳이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아릴 정도로 진한 향이 느껴집니다. 색깔은 보통 위스키보다 훨씬 진한 갈색으로 ‘무언가의 원액’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미즈와리, 혹은 온더락으로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지만 용감하게 스트레이트로 마셔봅니다.
위스키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맵고 뜨겁고 따가운 강렬한 타격감에 재채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내추럴 와인을 처음 마셔봤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 다가옵니다. 좋게 표현하면 개성이 강한 것이고 나쁘게 본다면 너무 강한 타격감에 맛과 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평론가의 극찬을 받았지만 대중의 외면을 받은 예술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와 같이 나의 교양과 경험의 부족함을 탓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번에는 온더락으로 다시 도전해봅니다. 이제야 코와 혀와 목이 편해지면서 비로소 향과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다크초콜릿의 진한 단맛과 고소한 향이 오랫동안 입안에 감돌면서 “아 정말 좋은 술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목넘김도 스트레이트로 마셨을 때와 전혀 다르게 매운 느낌이 없고 오히려 녹은 버터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듯한 오일리함이 느껴집니다. 너무 쉽게 넘어가서 한잔, 두잔 금방 비우게 됩니다.
강한 향과 맛 덕분에 고기와의 조합이 정말 좋습니다. 지방이 적은 부위를 수육으로 조합해도 좋고, 마블링이 많은 부위의 고기와의 궁합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약”
향: 매움, 따가움, 강렬함, 코조심
맛: 알콜 원액, (온더락) 다크초콜릿 느낌의 단맛
추천 음용법: 온더락/미즈와리/하이볼
추천 안주: 육향이 진한 고기
호: 개성이 강함, 재밌음
불호: 개성이 너무 강함, 너무 재밌음
결론: 스카치 위스키는 지겨우신 분, 삶이 무료하신 분
자투리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를들어 명품시계는 해가 갈수록 가격이 올라가고, 반대로 자동차는 매년 감가상각이 되고, 식품은 심지어 상해서 쓰레기가 됩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풍부한 수요와 공급의 제한, 그리고 가치의 보전 가능성입니다. 위스키와 명품시계는 이 3가지 요소를 다 충족하고 있지요.
수요과 공급은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됩니다만 가치의 보전은 그 자체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가치의 보전을 위해서는 우선 변질되지 않아야 하겠지만, 변질되지 않는 특성이야 돌/쇠붙이 따위에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보전이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맞추어 적응해 나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MP3플레이어가 사라지고 애플의 아이폰이 명품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직업도 그러합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업종은 대게 저 3가지 요소를 충족하고 있습니다. 의료계가 대표적이지요. 환자는 늘 있을 수 밖에 없고, 라이센스로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았으니 공급도 제한적이고 직업적 가치는 보전됩니다. 다만 MP3플레이어의 사례와 같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그 독보적 가치가 평범함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간은 술을 맛있게 만들고, 수육을 부드럽게 만들고, 소중한 것의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잘먹었습니다.
저는 이만 자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