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인간 행동의 근원은 수십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생존을 위한 선택과 도태의 반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식의 영역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하기 위해 먹어야하고, 더 양질의 영양소에 접근성이 좋을 수록 생존에 유리했을 겁니다. 이에 대한 집착이 미식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울타리는 더 견고하고 깨끗하고 크고 안락할 수록 좋습니다. 자연의 위협이 상대적으로 적은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욕망은 유효합니다. 강남, 신축, 한강조망, 학군 등으로 표현되는 더 좋은 울타리는 더 많은 부의 되물림으로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자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생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시는 것만 빼고요,
마시는 행위는 생존의 측면에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물은 생체 활동에 필수적이고, 단 음료는 육체 노동에 필요한 당분을 즉각적으로 공급한다는 이점이 있습니다만, 술을 마시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 인간이 흥미를 끌게 되었을까요?
술에 취하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시기 전의 상태보다는 둔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폭력성을 드러내거나 소란스러워지는 행동도 야생의 상태를 상상해보면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술을 발견한 인간, 최초로 취한 그 객체는 생존에 취약했을 것이고 유전자를 현대까지 전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현대는 술을 멀리하는 인간만 남아있어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렇지 않죠.
22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의 소주 소비량은 22억 9천만병이라고 합니다. 1인당 평균 53병이죠. 소주를 안마시는 사람도 있고, 소주만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매일 술을 마시고 있다고 추측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욕망은 생존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오히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잔의 술을 마시고 싶어하게 됩니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고대 장수가 승리한 전쟁에서 포로들을 처형하면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나, 현대극에서 재벌3세가 사무실에서 직원들을 세워두고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해도되니까,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물리적인 힘이 근원이든 나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이기에 술의 쓴 맛은 해방감으로 치환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보통인들은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와서 마시는 맥주 한캔의 맛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생존을 위해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 같은 시간입니다. 조금은 풀어지고, 조금은 나태해져도 되는 순간, 본능과 반대되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그런 시간입니다.
마시는 행위의 깊이와 넓이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아득히 뛰어 넘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필수적인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잘먹고 잘마시고 잘자는 것, 그것이 주는 한계효용에 대한 갈증을 수많은 tv쇼와 유튜브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먹방은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는 하나 보통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만큼의 금전적, 시간적, 육체적 여유가 없는 저로서는 예를 들어 트러플을 통째로 쓰고 수시간을 훈연하여 만든 덩어리 고기를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먹어치울 수는 없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이 이 지점에 있습니다. 24년 기준 만39세, 햇수로 16년차 회사원, 유명인도 기득권도 약자도 아닌 보통인의 잘먹고 잘마시고 잘자기 기록입니다. 퇴근하고 씻고 전날 미리 준비해둔 재료로 20분 내외로 만들 수 있는 자극적이지 않은 요리와 지난 여행에서 면세점 찬스로 구입한 술을 곁들어 먹는 소소한 행복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레시피를 안내하거나, 유행하는 술을 경제적으로 구매하는 방법을 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어떤 장소와 상황에서 어떤 페어링으로 더 즐거울 수 있을 지, 그리고 그 즐거움 가운데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취중 기록입니다.
물론 공익적인 목적은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찍 자러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