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국내 최초 리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일본 로컬 생산 와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본디 근본주의자라 “상식을 깨는 유쾌발랄한 새로운 시도” 로 만들어지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만의 카발란이나 일본의 야마자키 등이 보여준 최근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본 와인을 시도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와인 – 생트 네주 까르베네 쇼비뇽 2020


와인은 생트 네주(sainte neige, 아마도 이렇게 읽는게 맞을 겁니다) 까르베네 쇼비뇽 2020년 빈티지입니다. 저는 오사카 방문했을 때 면세점에서 대략 4천엔 정도로 구매했는데 국내 판매가는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국내에서 유통되는지도 확인이 안되네요.
생트 네주는 프랑스어로 신성한 눈을 의미합니다. 후지산을 덮고 있는 눈을 말하는 것이죠. 사실 와이너리가 있는 야마가타현에서는 후지산보다 원전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현이 더 가깝습니다. 원전을 덮고 있는 잿빛 낙진도 멀리서 보면 눈처럼 보이겠지요…
와이너리 –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시
와이너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시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특산품은 포도입니다. 아마도 와이너리가 처음 시작한 1950년대에는 잉여 포도를 처분하고 수익성을 높일 목적으로 와인생산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인을 생산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유럽의 포도 품종과는 달리 일본 현지의 포도 품종으로는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와 일본과 같은 곳은 와인을 생산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술을 만드는데 있어서 당분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당도가 높은 포도가 필수적이나, 이런 기후에서 자라는 포도는 무르고 당도도 떨어지죠. 일조량에 있어서도 불리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와인산지인 나파밸리만 봐도 연중 온화한 기온에 일조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습니다.
한국에서도 국산 포도를 활용하여 와인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부족한 당도 때문에 주정 과정에 당을 별도로 첨가한 제품이 많고 이런 제품은 마치 탄산음료를 마시는 듯한 질리는 단맛 때문에 좋은 품질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생트 네주는 과감하게 와인 양조에 적합한 품종을 들여와서 재배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자국화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불가능한 부분은 적응하는 쪽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현재 일본은 메를로 품종의 주요 산지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와인 품종으로 유명한 까르베네 쇼비뇽, 샤르도네, 피노누아 등도 농법 연구를 통해 일본 내에서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배울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 생산 농가에 대한 보호도 중요하겠지만 포도 재고를 소진하기 위한 의미 없는 상품화 보다는 와인 시장에서 경쟁력있는 포도밭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농가의 수익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시음 후기

사족이 길었습니다. 이번 와인은 후발주자의 특성상 기존 구대륙과 신대륙 와인과 비교하여 풍미의 재현력과 가성비에 초점을 맞추어 리뷰하려고 합니다. 같은 급이라도 가격이 싸지 않으면 굳이 일본 와인을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와인의 컬러는 진한 버건디에 밀도 높은 풀바디의 느낌입니다. 후추향, 가죽향, 오크향이 두드러지고 입안에 머금었을 때 과일맛을 바탕으로 강한 산도와 적당한 탄닌, 스파이시함이 느껴집니다. 페어링은 육향이 강한 붉은 고기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네, 중저가의 까르베네 쇼비뇽의 그 특징 그대로입니다. 밸런스가 아주 좋지는 않지만 현지 구매가 수준에서는 나름 가성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국내 유통시 관세, 주세를 고려하면 다른 좋은 대안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격경쟁력에서도 품질에서도 특별한 장점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족 – 현지화
우리나라의 현지화 시도는 토종이거나, 익숙하거나, 현재 있는 것을 활용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와사비라는 단어를 실제로 다른 품종인 고추냉이로 번역한다거나 오뎅을 재료 중에 하나에 불과한 어묵으로 번역하는 것처럼 말이죠. 국내에서도 꽤 오래전부터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나 대부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캠벨 품종을 쓰거나 머루, 오미자 등 기존 와인의 공식 밖의 재료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제 짧은 경험상, 생산자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와인이 맞는지 아니면 포도류로 만든 다른 무언가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옆나라 일본도 강수량이 많은 기후이지만 농법 개량을 통해 유럽계 품종을 재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아무도 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 보다는 유럽산 품종을 활용한 와인의 현지화가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제일 잘해왔던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쓰자는 것이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만의 카발란도 일본의 야마자키도 위스키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 위스키와 유사한 무언가는 아닙니다.
처음 시도에서는 아류에 불과하더라도 수입제품의 맛을 모방만 잘하면 가격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생트 네주처럼 2~4만원대 와인에서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으며, 헤리티지가 누적이되면 고급화도 가능할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고급화를 통한 수익성 개선이야 말로 당장의 농산물 재고소진보다 농가에 도움이되는 방향이라 생각됩니다.
<요약>
- 일본의 재현 능력은 대단하다
- 하지만 수입 기준으로 같은 가격대에 대안이 너무 많다
- 위스키처럼 성공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 우리나라도 유럽 품종으로 시도해봤으면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